7월 25일 일상



_ 몇 주 전부터 계속 아빠의 죽음에 대한 것들이 생각난다. 아빠보다는, 아빠의 죽음, 사건.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것들. 그 3년의 시간은 너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각자의 마음 속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사실 진부한 표현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진리값을 갖고 있다.) 나는 아빠의 죽음 앞에 마음껏 슬퍼할 수가 없었고, 슬픔 보다는 괴로움에 신음소리만 터져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수년이 지난 이제서야 깨달았다. 한 2주 전의 주말이었나, 문득 우리 가족이 왜 이런 일을 겪었어야만 했나, 하느님이 야속하고 밉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불행에 의연하고자 하는 것이 지난 30년 동안의 자세였기 때문에 한번도 생각지 않은 감정이었는데, 문득 누군가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행을 억울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러한가? 불행을 대하는 모두의 자세는 어떠하지?) 나는 지금 하느님께 어느 정도 기대고 있으니, 하느님께 투정부리기로 했다. 나의 엄마에게는 이런 투정을 부릴 수가 없다.
  그리고 오늘 인터넷에서 오늘 미사 말씀을 찾아보았다. (운명론자, 천주교 신자가 다 된 나는 이렇게 마음의 위안과 맹신을 찾는다.) 첫번째 말씀 내용은 대충 죽음과 모든 고난이 있어도 우리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며, 그 안에서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실 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 일어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death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아빠의 죽음과 사건이 나를,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었나? 일정 부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만 해결했어야 했나? 평생 없어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 과연 어떤 도움일까? 내가 너무나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예 뿌리를 꺾어서 다시 심을 수 있는 경험이 필요했던 걸까?

  때마침 동생이 보내준 편지에도 동생이 묵주 기도를 하며 아빠 사건을 하느님께 내려놓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_ 요즘 ㅎ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데, 그것을 듣는 ㅂㄴㅅ는 한국 미니 드라마 보는 것 같다며 좋아한다. 너무 신경 쓰여서 조만간 드라마 결말을 지을 생각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물고기 가젯 (위젯)